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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 용 / 보 / 기
글작성자
 방현철 2004-06-15 23:40:43 | 조회 : 924
제      목  지금 다시 이순신을 말한다

지금 다시 이순신을 말한다
현직 판사, 이순신 평전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 펴내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종찬(lsr) 기자    



  

▲ 김종대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  

ⓒ2004 북포스
"이순신의 죽음을 자살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 견해는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해 죽이려 했고 당시 유성룡도 파직을 당해 이순신을 옹호해줄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언젠가 자신도 당쟁 속에서 역적으로 몰리고 그 삼족이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갑옷을 벗고 왜적의 총을 이용해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녹둔도 둔전관 시절에 병사 이일로부터 죽임을 당할 처지에 처했을 때나 정유년에 역적으로 몰려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나 한결같이 "죽으면 죽는 것이다"라는 생사를 초월한 장수로서의 뚜렷한 사생관을 나타냈고 그 사상은 그의 일생을 통해 변함이 없었다.

-263쪽 '7년 전쟁은 끝나고, 님은 가다'

"싸움에 나서서 죽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필생즉사(必生卽死) 사필즉생(死必卽生)".

이 말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군사들에게 내세운 임전훈(臨戰訓)이다.

그래. 그래서 무려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따른 여러 가지 추측들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과연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왜적이 쏜 조총을 맞고 죽었을까. 아니면 일부 학자들의 말처럼 자살을 했거나, 죽음을 가장한 채 야인으로 살다가 죽었을까.

이에 대해 글쓴이는 노량해전이 보기 드문 근접전으로 인해 사상의 위험도가 그 어느 전투보다 높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왜적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던 이순신 장군이 전선의 뱃머리에 서서 군사들을 진두지휘하다가 조총을 맞고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 짓는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고개를 쉬이 끄덕이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고 있던 이순신 장군이 탄 전함이 조총을 맞을 정도로 왜선과 가까이 있었을 리도 없으며, 만약 조총을 맞았다 하더라도 성능이 아주 약한 탄알이 이순신 장군의 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학자들은 아산 금성산 아래 모신 이순신 장군의 무덤을 왜 16년이 지난 뒤에야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다. 이는 결국 이순신 장군이 전쟁이 끝난 뒤 정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죽음을 가장한 채 야인으로 살다가 16년이 지난 뒤에 실제로 죽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필자는 임진란의 전사나 충무공의 전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적 소양이 있어 향기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 공직에 매인 몸이라 시간도 없었거니와 애초 그런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 다만 그의 인품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진위가 불명한 역사적 사실은 그 기술을 피했고 과장하거나 주관적 기술도 삼가했다." -'책머리에' 몇 토막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현직 판사 김종대(54)가 충무공의 일대기를 그 나름대로 다시 꼼꼼하게 쓴 이순신 평전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북포스)가 나왔다.

'시대를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1부 '무관으로 공직에 나아가다', 제2부 '임진란과 연전연승', 제3부 '7년 전쟁은 끝나고, 님은 가다'를 포함해 모두 3부에 '여진족을 물리치다', '큰 재난을 내다보다', '민중 지도자로서 땀 흘리다', ''시련과 고난의 시간' 등 25편의 글이 이순신 장군의 긴 그림자로 일렁거린다.

김종대는 이 책에서 이순신 장군은 시대를 고뇌하는 인간적인 장수이며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나아갈 바를 잃지 않고 백의종군까지 한 진정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라고 내세운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출생에서부터 노량해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마리 은어처럼 파닥이며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근데 왜 또다시 이순신인가? 이에 대해 기획자는 "지금 우리 사회는 개혁에 따른 지도자의 결단과 진정한 리더십이 그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며 "그런 까닭에 임진왜란 당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이순신의 바람이 드라마, 영화, 만화 등 전 문화계 영역으로 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이순신은 파직된 이듬해(38세) 1월에 도로 서울로 올라와 그해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복직하게 되는데, 복직될 때까지는 집에서 쉬면서도 활터로 나가 무예를 연마했다. / 그 해 활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순신은 평소에 좋은 화살통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병조판서 류전이 그 화살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절호의 복직 기회를 만났건만 이순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까짓 화살통 하나쯤 드리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이것 하나 때문에 다같이 더러운 이름을 얻는다면 그 얼마나 미안한 일이겠습니까?"

이순신의 이 기가 찬 말에 류 판서는 "그대 말이 옳다"고 거듭 말하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 또 이런 일이 있었다. / 당시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이순신이 훌륭한 인재임을 듣고 유성룡을 통하여 한번 만나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유성룡도 파직되어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던 이순신에게 율곡을 만나보도록 권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첫마디에 거절했다.

"나와 율곡이 같은 덕수 문중이라 서로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그가 전상(銓相)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옳지 못한 일이오."

-34~35쪽 '청렴결백한 장수로 살아가다' 몇 토막

이순신 장군은 23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모두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자신을 모함한 사람들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부당하게 파면을 당해도 요즈음 사람들처럼 복직운동을 할 생각은커녕 그냥 집에서 무술을 갈고 닦으며 때를 기다린다.

  
판사 김종대는 누구인가?  
1974년 공군 법무관으로 법조계 내디뎌  




▲ 판사 김종대  
ⓒ북포스  
"나는 이순신 이 어른이야말로 진정으로 훌륭한 공직자의 상을 구현했고, 길이 우리의 자식들에게 그 모습을 전해주어야 할 이 민족의 참 스승이라 믿는다. 그러하기에 나는 무엇보다 이 작은 글을 통해서 나의 자식에게 참 스승을 찾아주었음에 큰 기쁨을 느낀다." -'책머리에' 몇 토막

지금 판사에 재직 중인 김종대는 1948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김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부산에서 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74년 공군법무관을 시작으로 법조계에 첫 발을 내디딘 뒤 주로 부산ㆍ경남지역에서 법관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의 출세와 당리당략을 위해 차떼기로 돈을 실어나르며 물불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요즈음 정치인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창 멀다.

이순신은 당쟁에 얼룩진 시대에 살면서 아무런 까닭없이 좌천당하고 해를 입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또 그러한 타고난 강직한 성품과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청렴성 때문에 선조와 권력자들에게 더 많은 미움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래. 내 어머니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 그러므로 바람이 불면 더더욱 몸을 숙이는 대나무를 본 받아라' 라고. 그래야 눈 깜빡하는 순간에도 코를 베이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출세나 명예는 내가 얻고자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 어쩌면 이순신도 파직을 당하고, 백의종군을 할 때 대나무처럼 좀더 낮게 몸을 엎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살통만 내주면 복직이 확실한, 병조판서의 은근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같은 문중이던 율곡에게도 이조판서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았던 것이리라.

"남해 현감 기효근의 배가 이순신의 배 곁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기효근은 예쁜 계집아이를 자기 배에 태워놓고 혹시 남이 알까봐 쉬쉬하였다. / 이순신은 이 사실을 자기의 일기에 적어 탄식했다.

"나라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예쁜 계집을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가짐을 이를 말이 없다. 그러나 그의 대장 원 수사 역시 그러하니 어찌하랴."

-176쪽 '한산섬 달밝은 밤에' 몇 토막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특히 여성관계에 아주 근엄했고 지나칠 정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장군은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에도 여성관계를 단 한번도 가지지 않았을 정도로 여성을 멀리 했다.

이는 아산에 머물고 있던 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장군은 7년 전쟁 중 부인에게 단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국난을 당한 국가로 보았을 때는 이순신 장군이 충신 중의 충신이었으나 가정생활에는 거의 빵점에 가까웠으니 요즈음 여성들에게는 당장 이혼감이었다.

갑오년 8월, 이순신은 부인의 병이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맏아들 회를 통해 듣는다. 그때에도 장군은 난중일기에 "이날 아침 탐선이 들어와 아내의 병세가 아주 위중하다고 한다. 혹시 생사간에 벌써 결판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이야 생각할 길이 없다"라고 적는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 수림의 따님으로 중종 10년(1515년)에 나서 이순신의 아버지 정(貞)에게 출가하여 31세에 셋째 아들 이순신을 낳았고,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78세의 고령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그 어머니만을 여수 본영 가까운 곳으로 피난와 있게 해놓고는, 거의 하루가 무섭게 어머니를 그리고 문안하고, 소식만 들어도 반기고, 몇 날만 막히면 걱정했음이 그의 일기에 소상히 적혀 있다.

"전쟁 2년 동안은 뵈온 일이 없었고, 갑오년 1월 1일, 11일, 12일에 뵈올 수 있었던 것은 휴전 중에 여수 선소에서 배 만드는 일을 시찰하러 갔던 길이었으며, 을미년은 못 뵈었고, 다음해 1월 1일에 뵈었다."

-182쪽 '한산섬 달 밝은 밤에' 몇 토막

이순신은 아내에게는 그렇게 차갑게 대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둘도 없는 효자였다. 난중일기에서 ""종일 노를 저어 밤중에 어머님 앞에 이르니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몇 날 더 보전하시기가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로하며 그 마음을 풀어드렸다" 고 적었을 정도로.

그래. 요즈음 사람들 누가 자신의 근무지에 어머니를 모시고 갈 것인가. 그것도 아내는 고향에 홀로 내버려 둔 채. 만약 이순신 장군이 요즈음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당장 마마보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리라.

"이순신은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다시 해남의 이진으로 옮겨가는데, 공은 거기서 토사곽란으로 수일 동안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는 이진을 떠나 다시 어나진으로 올라갔다가 8월 28일에는 갑자기 거기로 습격해 온 적선 8척을 물리치고 저녁에는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8월 29일 척후병으로부터 적의 대군이 야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아직 전력을 수습 못한 그로서는 일단 왜의 대선단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진도고을 벽파진으로 이동했다. / 이 무렵 조정에서는 너무도 빈약한 전선이라, 이순신에게 명령을 내려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막으라고 했으나, 이에 이순신은 천하의 명언을 남긴다.

"아직도 신에게는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전선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사오매,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하리이다."

-220~221쪽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겠노라' 몇 토막

그렇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선 조상 탓이나 주변 사람 탓부터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면 그건 모두 자신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하지만 이순신은 결코 임금이나 주변 사람들을 탓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겨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처럼 열두 척의 전선뿐이라며 아예 비관을 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다며 새로운 희망을 불태웠던 것이다.

" ……파도는 영웅의 한을 풀지 못하고
부질없이 역사에만 큰 공로 적혔네
오늘에 참 대장부 몇몇이더뇨
슬프다 충의의 이 장군이여! "

-262쪽 이순신의 만장에 쓴 지봉 이수광의 글

김종대의 이순신 평전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는 그동안 우리가 교과서나 위인전 등에서 알고 있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어지럽고 위태로운 시대를 고민하는 무인으로서의 이순신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2004/06/08 오후 2:24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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