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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들은 방문객 2,000명 중에 한분이 남겨주신 변산여행 후기 입니다.
여행 가기전에 질문 남기기는 쉽지만 다녀와서 글 남기기는 상당히 어려운것 같습니다. ^^;
어려운거 마다않고 글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전체 | 일반 (37) | 최고였어요 (67) | 좋았어요 (103) | 별로였어요 (5) | 다신안가요 (8)
내 / 용 / 보 / 기
글작성자
 박흥열 2003-10-23 17:40:58 | 조회 : 5042
제      목  변산반도를 가다(1)
기간 : 2003.10.18..13:30 ~ 2003.10.19..22:00 (1박 2일)
숙박 : 정든민박
식당 : 모항포장마찻집(상호를?), 군산식당, 변산온천산장
이동 : 자가용
이동로 : 모항-정든민박-곰소염전-이름모르는 조선소-격포항-변산해수욕장-새만금방조제-해창갯가-지석묘

1. 선운사, 아니 변산
2. 모항에서 지는 해
3. 정든민박 정든주
4. 곰소, 퍽 쓸슬한 소금밭
5. 학생해양수련원지나 왼쪽 길에 조그만 조선소
6. 격포항 쌍등대
7. 어라? 변산해수욕장
8. 바다의 무덤 새만금 방조제
9. 변산온천산장 반지락죽 한그릇
10. 해창 갯가에서의 굴맛
11. 고인돌, 아니 낑낑 돌

------------------
1. 선운사, 아니 변산

선운사를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미당선생의 육자배기 막걸리때문도 아니고, 송창식씨의 눈물처럼 후두둑진다는 동백꽃을 노래한 뚝배기 콧소리 때문도 아니었다. 해 전 어느 날인가 문득 걸려와 고인 형의 짤막한 전화 때문이었다.

'외로와서 선운사에 갔다 왔다. 좋더라. 갔다 오니까 더 외로와 지더라'

기러기 아빠가 된 형의 그 세마디 말이 그만 내 가슴을 한 삽 떠내고 말았다. 시를 쓰려면 온갖 미친짓을 다 해봐야만 한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우리들의 대학 초년 시절에, 문득 가방을 싸갖고 안개속의 절을 찾아 떠났던 형은 어느 날인가 안개처럼 다시 돌아와 있었다. 그 때가 코끝을 싸악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너무 오래 잊어먹고 살았던 것들이 쏘세지처럼 줄줄이 매달려 올라왔다. 무엇이었을까. 오래된 기억이 알싸한 안개의 냄새같은 감각으로만 떠 올랐고,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형처럼 나도 선운사를 한번 갖다 오면, 잃어버린 인생을 열어줄 아주 오래된 기억이 그림처럼 떠 올라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득생각에 힘받아 어찌 찾아 본 선운사에 대한 소개글에서 '봄 동백도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도 아주 좋더라'는 정보 한줄기가 그런 설죽은 마음에 액젖을 콸콸 뿌리고 양념을 썩썩 버무리고 있었다.

뭘 찾아서 가야만 하는 이유를 보태느라고, 여러가지 기억들이 자질구레 떠오르기도 했다.

결혼 전에 아내와 약속한게 한가지 있었는데, 한달에 한번씩은 가깝거나 멀거나 바람을 쐬가며 살자던 것이 그 약속이었다. 결혼을 하고 벌써 한 구년이 지나도록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아내는 아주 오래전에 그런 지켜지지 않는 약속따위 말끔하게 포기하고, 인생이란 걸레를 치대어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먼지나 닦으며 사는 것이라며 고개를 외로 꼰지 오래였었는데,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약속을 마음에 담아두고 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에 대한 이 오랜 채무감이 내 게으름에 시동을 걸고 기어이 기어를 당기고 말았다.

가만 보니 그 두가지 이유가 서로 다른게 아니었다. 가족을 손 앞에 두고 좀 더 나은 조건이란 발판을 위해 지치도록 뛰어 다니기만 했던 시간들이 갑자기 아까워졌다. 가야겠다. 또 먼 들판을 기는 연기꼬리 잡듯 이 가을을 보내버리고 아쉬운 빈손만 썩썩 부비고 섰는 내 모습을 확인하게 되기 전에 발걸음 뚝 떼어내고 가보기나 해야겠다. 몇가지 대강의 의심을 저울질하는 뒤란에서는 마음이 먼저 후다닥 달려, 이번엔 꼭 가야만 하는 것으로 확정짓고 있었고, 안가면 또 십년 반드시 후회하리란 생각이 대못처럼 꾹꾹 박혔다.

그런데, 가기로 마음 먹은 주말까진 한 삼일 남았을 뿐이어서, 갑작스레 숙소를 예약할 수가 없었다. 홀몸으로 바랑메고 떠나는 길이 아니라서, 숙소는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어쩐다. 내게는 커다란 짐가방 만한 애들이 둘, 그리고 그에 부속된 갖가지 짐들이 기차처럼 줄줄이 딸려 있었고, 처와 둘이서 숙소도 예정 짓지 못하고 그 많은 짐을 추스려 가며 떠날 수 있는 길이란 애시당초 어느 하늘 아래에도 없었다.

인간이 무심하기는 백년을 살아도 제 버릇을 남 못주는 것이어서, 선운사가 표시된 지도 바로 위에 변산반도가 눈에 들어와서야 구년전인가 십년전인가 아내가 언제 한번 변산반도에 꼭 데려다 달라고 했던 말이 벼락처럼 기억났고, 그제야 달랑 혼자 있는 선운사가 별로 볼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변산반도야 말로 내가 찾고 싶어하던 알싸한 기억의 꼬리를 붙들고 있는 유일한 땅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간사한 것 같으니). 인간이 살다가 한 구년이나 십년쯤 해 보지 않던 일이 있으면, 그리고 그걸 구년이나 십년만에 해 볼라고 한다면 나처럼 맥없이 중심을 잃고 헤벌레 헤메게 되어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나는 그제야 처에게 말을 건넸으니, 이번 주말에 길을 떠나려고 한다는 것이었고, 거기가 당신이 그렇게 그렸던 '변산땅'이라는 식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짜-쟌!이었는데, 입이 함박이 되어야 할 아내는 저 인간이 또 뭔 죄를 지었길래 풍선을 부나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싫을리야 있겠어?


2. 모항에서 지는 해

토요일 오후의 상습적인 고속도로 정체를 각오하고 떠나는 길이었다. 4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39번으로 갈아타고, 매송인터체인지를 디뎠다. 매송-발안-송악을 지나면서, 송악이 여기도 있네? 저거 개성의 옛이름 아닌가? 그런 무식한 언사하나 송악에 떨어뜨려 주고, 당진지나 서산에서는 대관련목장 다음 간다는 서산 목장이 고속도로 위를 가로질러 좌우로 있다. 마치 중학생 까까머리 깎아준 것처럼 생긴 산들이 부끄러운듯 좌에도 우에도 공평하니 널려 있었다. 해미에는 해미읍성이 유명하지? 수덕사도 있네. 비구니 대찰로 유명한 곳이쟎아? 홍성을 지날땐 지진이 생각나고, 광천에선 어라? 여기가 광천수 나오는 덴가? 이런 무식한 말을 되는대로 내 뱉다가, 여긴 동굴에서 숙성시킨 젓갈이 유명한 곳이쟎아.. 이런 것도 배운다. 아무케나..똥을 밟아도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이 여행을 '떠나는 마음' 아니겠어? 줄달려 대천-서천을 지나니 바로 군산이다.

군산.. 예전에는 일제시대 수탈의 항구도시로만 기억되던 곳이었는데, 얼마전 부터는 윤락가 아가씨들의 서러운 죽음으로 먼저 기억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자물쇠에 잠겨 타죽은 꽃..가진자가 못가진자를 알겨먹는 짓거리가 역사를 두고 되풀이되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부러 보여주는 치열한 땅이다 싶었다.

개**들아 개**만도 못한 사람**들아
가난 때문에 순결을 팔고
첫사랑의 추억에 우는 항구의 여자를 생각하면
가난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타향에서 억지 술에 가슴이 터지는 바닷가의
처녀를 생각하면
나는 미치겠다 네놈들 화이트칼라들을 자본가들을
한 입에 못 씹어 먹어 환장하겠다 환장하겠다.
-「항구의 여자를 생각하면(김남주)」중에서

쉬하고 쉬었다 갈려고 군산휴게소를 들어 갔다가, 휴게소 뒷뜰이 아득히 넓은 들판이고, 그 들판의 끝에 오후4시의 가을햇살을 가득 반사시키는 몇센치 두께의 바다띠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걸 보았다. 그 바다띠의 빛속에 두어척 고깃배가 보였다면 나의 환상이었을까?지평선인줄 알았더니 결국 수평선이 된, 하늘..바다 한줄..그리고 들판..

넘어와서, 김제.. 그런데 도대체 어디가 징게멩게들판이냐..넓기는 넓다..그러면서 서해안고속도로를 건설한 도로공사에 불만이 생긴다. 운전수야 백번 앞만보고 달려야 하는 것이지만서도, 도로 옆 추락방지벽이 승용차 여행객들에게는 너무 높았다. 서해대교에서도 그랬지만, 도무지 바다고 들판이고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라는 암시인지, 좌우로 너무 멋진걸 보여주면 그거 보다가 교통사고 날까봐서 그러는 건지..그러나, 그런 차원이라면 방지벽 높이가 승용차만 못보게 될리는 없다.. 아뭏든 대단히 아쉬운 장면이 아닐수 없었다. 뭐 약올리느라고, 힐끔힐끔 들판이 경계벽을 넘어오다 말다 뵈다 말다 그런다. 억울하면 짚차나 봉고차 사라는 거냐, 뭐냐..비맞은 뭣처럼 두덜두덜 대는 동안, 차는 쏜살같이 달려 부안을 지나고 줄포에 닿았다. 고렷적 공물창고가 있었다던, 그래서 또한 매우 커다란 항구였다던 줄포는, 그러나 고적하고 한적하고 인적드문 시골이다.

일이 되느라고 길이 하나도 막히지 않았다면 나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토요일 1시30분 출발한 서해안고속도로를 네시간만에 뒤로 뒤로 깔고 줄포인터체인지(매송-줄포 9천원)를 나와 23번 국도를 타고, 고려청자로 유명했다던 도요를 지나, 곰소앞에서 갈라진 길을 타고 내소사 앞 마당에 닿았다. 내소사 다오도록 '정든'민박집이 안보이는데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는 아저씨가 있다. 저기가서 물어보자고 그 앞에 섰다.

"4천원이요"
"아니요, 아저씨 저 정든민박 가는데요, 길좀 여쭤볼라구요."
"아, 거긴 돈내고 들어가면 조 안에 있어요"
"예? 민박집이 국립공원 안에 있어요? 근데, 민박집 가는데 이거 내야 되나요?"
"예. 내야 돼요. 내고 들어가시면 돼요."
"근데, 오늘 입장료 내면 날짜가 찍혀서 내일은 못 써먹쟎아요? 저흰 채석강 같은데 내일 갈건데요.."
"괜찮아요, 내일도 쓸수 있어요"
"그래요? (어차피 낼거 생각없이 내고 말았다. 아내는 전화가 와서 통화하느라 바쁘다. 내고 보니 영수증이 입장료가 아니라 주차료다. 에잉, 이상타..이미 발차한거 돌려가 물어볼 수도 없고..그냥 간다.)

아주 작은 다리를 건너는데, 다들 걸어가는 길에 차를 들이밀라니 영 어색하다. 슬금슬금 가는데 바로 오른쪽으로 '정든'이 보인다. 입구부터 좌우로 꽃길이 눈부시고, 잎은 버리고 붉은 마음같은 감만 주렁주렁 단 감나무가 밭이다. 호오, 황토집이네? 그 앞에 차를 댔는데, 이집인지 저집인지 알 수가 없다. 황토집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께서 정든민박오셨냐고 하신다. 오른쪽 황토집은 아직 짓는 중이고, 왼쪽 본 집이 바로 정든민박이다.

행여 복있으면 서해안 일몰을 볼수 있을까, 안되면 가면서라도 지는 가을 저녁을 담을 수 있을까 했더니, 아직 청청한 무렵에 도착을 하고 말았다. 나같이 자타만인이 인정하는 길치에겐 천복이 나리신 일 아닐 수 없다. 5시 30분.

민박집 위치를 확보했으니 해가 지나 안지나 확인하러 가야겠다고, 마당에서 일하시던 어른께 어디로 갈지를 여쭈었더니 차로 20분 나가면 모항인데, 6시경 지니까 지금 가면 딱 볼수 있다시는 거였다. 지는 게 잠깐이라고 하신다. 더 들을 말씀 있겠나. 차를 돌려 바지런히 모항을 찾아 가는데, 이거 웬 대관령 고갯길 같은 꼬불길이 해지는 언덕이 곧 나올락 말락 끊어지듯 이어지고 있었다. 해는 점점 낮아지고, 길은 마무리 되지 않고, 좌우상하로 구불거리며 둔덕 아래로 내리 붙다가 갑자기 오른 언덕에, 아! 상당히 벌개진 해가 마악 바다에 닿으려고 하는게 아닌가!

언덕에 차를 대고 보니 발치에 낙조를 보는 사람들이 빼곡히 차를 대 놓고 있다. 그러니까, 원 낙조대에서 한 언덕 더 올라와 있던 셈인데, 부부인듯한 중년남녀 한쌍이 조 아래로 내려가면 보기가 더 좋다고 은근히 이른다. 둘이만 있는 언덕에 불쑥 껴들어 분위기를 깬 모양인데, 둘레둘레 보아도 내려갈 길이 마땅치 않다. 내려가는 새 해가 지고 말겠다 싶기도 한데, 마침 봉고차가 와 붙고 사람들이 우루루 내리더니, 차가 두어대 더 붙어서 이 자그만 언덕도 만원이 되고 말았다. 미안할 새 없이 벌어진 일이다. 분위기가 깨진 둘이는 어느새 차에 가 앉았는데, 그런 눈치가 없는 봉고사람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기념촬영을 한다, 낙조를 본다 깔깔대며 시장바닥처럼 되어 버렸다. 우리도 캠코더를 갖고 해를 찍었는데, 해가 지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춥다고 가자는 분위기고, 날이 너무 좋아서 였던지 하늘을 그리 붉게 흘기지 않고도 해는 얌전히 바다에 잠겼다. 바다의 수평선 위에 만두같은 섬 두개가 있었는데, 그 왼쪽 것, 좀 더 빈약해보이는 한쪽 만두에 걸쳐진 해가 이글이글 숯불덩이처럼 붉다가 꼴깍 져버리는 건 정말 잠깐 이었다. 붉은 한 점이 마악 묻히기 전, 누군가 안타까운 아이고 소리를 냈다. 날마다 지는 해를 보고도 저리 안타까운 것을, 사람의 한 생이 지는 걸 보게 되는 사람은 전생에 얼마나 죄가 많은가.. 해가 졌다. 사람들은 혹은 박수를 치고, 혹은 사진을 다 찍었으니 아쉼없이 돌아가자고 금새 언덕이 텅 비었다. 해가 진 그 한쪽 만두가 혹시 공군사격연습장으로 섬이 날아가버리다 시피했다는 그 섬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신문을 잘못 찢어 읽은 거던가..

돌아보니 여기가 그 찾아가던 모항이다. 발치에 커다란 모텔이 있고, 저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을 한번 가보고 싶은데 선자리에선 길을 못찾겠더니, 그쪽으로 내려가는 길인듯 싶은게 공사중이라 막혀있다. 돌아가는 길이 있을 줄 짐작하고, 살살타고 내려가면서 보니, 과연 길이 있다. 무작정 들어가보니 가고 싶던 그 마을인데, 어디로 가야 바닷가가 나오는 지 모르겠지만, 길따라가면 그 끝은 다 바다가 아니겠는가. 골목을 돌아 가다보면 차돌려 나올데 있으리라고 골목을 들어서다 보니 웬걸, 막다랐을 것 같던 그 골목길 끝에는 제법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바다가 작은 고깃배들과 정말 작은 방파제와 아주 소담한 흰등대 하나의 손을 잡고, 강아지 혓바닥 같은 파도로 선착장을 쓰다듬으며 마중 나와 있었다.

해는 졌어도, 아직 푸른 바다에 검은 빛 어둠이 차분히 내려 깔리는 중이다. 몇몇 사람들은 채 십여미터밖에 안되는 방파제 끝 등대 아래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고, 마침 들어와 밧줄을 묶는 고깃배가 하나 있고, 아이들은 강아지 혓바닥 같은 파도가 신발을 물으러 쫒아온다고 파도랑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깔깔 거리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서 바다를 보는게 얼마만인가. 갈매기 한두마리 끼룩대고 잔잔한 파도 몸 뒤척이는 소리가 출렁출렁 귓전에 달다.



[모항으로 가는 길(안도현)]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 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이 시를 한둬번 본 적이 있다. 안도현시인의 모항에 대한 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같은 안도현 시인의 '숭어회 한접시'라는 시와 대강 짬뽕이 되어서는 '눈이 싸락싸락 내리는 날이면 모항에  포장마차 촌에 가서, 손 뿕은(뿔어서 붉은) 아주머니가 썰어주는 싱싱한 회한접시에 소주한잔 해야 한다'는 걸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기억이란 대개 이 모양이다.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머리 속에 담겼을 때는 거의 많이 망가져 있다고 보면 된다. 확실한게 하나도 없는 내 머리속에서 정말 확실한 거 하나가 그거다.


[숭어회 한 접시(안도현)]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이름은 모항인데, 아주 작았다. 늙으신 걸까. 저녁 예닐곱시의 시골마을이 가진 그 조그만 정적을 뒤로 하고 모항을 떠났다. (나중에 지도를 뒤져보니, 띠'모'자에 항목'항'자 茅項이다. 우리말로 '띠 목'이라 불렀다는데, 변산면 수락동 동남쪽 바닷가 어촌으로, 뒤편의 밭, 뒤밭,혹은 띠풀밭을 일구어 마을이 들어섰다고 하여 띠목, 한자로 모항이다. byunsan.net에서 참조)

이제 배를 좀 채워야 했는데, 나는 위에 말한 대로 섞인 기억을 갖고 '모항가는 길'에서는 나오지도 않은(실은 군산 도선장 부근에 있는) 모항 포장마차촌('촌'은 그야말로 근거없는)을 찾고 있었다. 모항을 나와 해안도로를 타고 언덕하나를 오르니 웬걸, 거기 정말로 포장마차촌이 있는게 아닌가! (물론 그당시 나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있는거고, 거기가서 회를 한 접시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놀랄일은 아니다. 다만 기록하는 지금에서는 여우집을 갖다온 것 같이 놀랍다.) 이집 저집 살살 가면서 보는데, 백합죽집이 하나 눈에 띄었다. 아내가 장거리 여행에 놀랬는지 속이 좋지 않다던 참이라, 민박집 들어가던 입구 인근에 있던 바지락죽집에서 우너조는 아니지만 그 유명한 바지락죽을 먹어볼라던 참이었는데, 거기까지 갈 것 없이 여기서 백합죽을 먹어보고, 바지락죽은 내일 원조집에 가서 먹자! 이렇게 됐다.

차를 세우고, 백합죽(1인분에 7000원)을 세개만 시키고, 운전을 해야하니 술은 못먹더라도 회나 한접시 먹어보자고 보니까, 숭어회같은 퍼덕이는 어종의 회는 우럭, 광어, 새우고 나머진 전부 조개종류의 회다. 우리네는 또 조개종류 회는 별로여서 갈등을 꼬고 있는데, 아주머니 말씀이 더 넉넉하다. 드시고 싶은 거 드시던지 마시던지 하라는 말씀인데, 장사꾼 티가 안나고 그저 동네 아주머니 같다. 새우가 대단히 싱싱해서 물어보니 키로에 삼만원이란다. 쫌 부담스런 식사값이긴 했는데, 조개회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새우소금구이가 나을 것 같았는데다가, 새우는 9,10월 한철이라 지금 며칠만 더 지나면 들어가 안나오고 내년에나 나온다는 거였다. 우리네는 또 제철음식이라면 굉장히 근사한 걸로 보이질 않는가. 속물근성도 한 겹 접고, 내가 개인 용돈에서 한번 산다는 개념이어서 새우를 시켰다.

냄비를 불위에 올려 놨는데, 냄비바닥에 호일을 깔고 호일위에 굵은 소금을 반센치 정도 두텁게 깔았다. 뚜껑을 닫고 불을 붙이니 소금이 갈색으로 구워지면서 딱딱해 졌다. 바닥 소금의 반 정도가 구워져 갈색으로 바뀌었을 무렵에 타닥타닥 튀는 새우들을 냄비에 넣고 순식간에 뚜껑을 닫으니 안에서 난리가 났다. 아, 정말 생생했는데, 아주 잠깐이었다. 곧 조용해 지고, 잠시후 뚜껑을 열고는 한마리씩 뒤집어 놓고 다시 익혔다. 그러더니 이젠 먹어도 된다고 뚜껑을 열고 불을 껐는데, 크기는 대하라기보단 시장에서 파는 기준으로는 중하정도 였지만, 시장에서 얼었던 것을 사먹는 것과는 맛이 달랐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까지 않고 그냥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소금이 굉장히 많아서 짤줄 알았더니 소금은 굳어서 적당히만 묻었고, 그 소금이 가열된 열기가 새우를 맛있게 익히는 비결인것 같았다. 수조에서 뛰던 새우를 봐서 더 그랬을까, 맛이 정말 좋았다.

이어서 백합죽이 나왔는데, 백합을 구경할 수 없게 다져서 씹는 맛은 아쉬웠으나, 죽이 매우 입에 달고 맛있었다. 백합이 원래 입에 그렇게 단 성질을 가진 재료인가보다 하였다. (여기서 달다는 건 맛있다는 얘기다. 설탕처럼 단맛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나중에 바지락죽을 먹어본 얘기도 하겠지만, 이 집의 백합죽은 원재료의 맛을 잘 살린것이던지, 아주머니 손 맛이 좋은 것이던지 참 맛이 달고 맑은 것이었다. 게다가 곰소젓갈 얘기를 좀 하다 말았지만, 아주머니는 직접 젓갈재료를 사다 담궈 드신다고 하셨는데, 김치맛이 정말 좋았다. 전라도식 젓갈이 듬뿍들어간 김치맛을 좋아하는 양반이라면 누구나 침흘릴 만 하다.


3. 정든민박 정든주

밤이 꽤 깔렸다. 배도 부르고, 가다가 민박집 앞에 가게에서 소주나 둬병 사들고 가서 내소사 앞 자락의 밤을 김치찌게로 오손도손 밝히면 그만일 것이고, 아니면 내일의 일정을 위해서 그냥 자도 고즈넉한 밤이 될 것이다. 길이 단조로와서 헤메지 않고 민박집 까지 왔다. 주차료를 징수하던 분들도 없고, 에그머니 가게도 문을 닫았다. 아직 8시경이었는데, 세상이 다 잔다. 할 수 없이 그냥 들어와 방에 짐을 풀었다.

담이라기엔 미안하고 턱이라기엔 좀 높은, 그래서 마당도 방문도 훤히 들여다 보이는 돌울타리를 죽 돌아가니 정든민박이라 씌인 항아리가 밖 길에서 제일 안보이는 데 가 서있고, 비로소 집의 입구다. 낮디 낮은 돌울타리때문에 행길에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 정작 대문은 돌아앉은 형국이다.

뜰에 돌 하나, 나무 한 주가 다 이름표를 달고 있다. 집을 위해 돌이나 나무가 있는게 아니라, 제 각각이 저의 주인이요, 중심이라는 말씀같다. 첫 인상이 너무 깔끔하고 깨끗한 집이었다. 자동차 튜닝이 취미인 사람도 있듯이, 이 집 주인어르신은 집을 꾸미고 가꾸는 취미가 있으신가보다. 문틀 하나에도 댓돌자리에도 지저분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걸레질로 수도행을 하는 스님이 가꾼 정갈한 산사에 온 느낌이다. 문은 격자나무문짝에 한지를 바른 옛것이었다. 벽에 도배를 하고, 무늬를 내어 덧바른 솜씨하며, 옛집의 정취를 살리려고 천정에는 끊어진 전깃줄을 소형애자에 조로록 달아 놓았다. 방 한 쪽 구석엔 작은(아마 쪽문으로 쓰던 것 같은 크기의) 격자나무문틀을 모양으로 붙여 놓았고, 벽에 옷걸이 하나도 생나무를 활용한 공예품이다. 우리 가족 하룻밤을 보낼 처소의 생김이 곱고 정갈하여 마음이 차분히 놓이고, 기분이 좋아진다. 정이 라는게 이렇게 순식간에 들어버려도 되는 건지 싶다.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시고 그러시나.. 쥔어른께서 주그러진 양은 세숫대야에 나무 조가리를 넣고 모닥불을 피워 올리시면서, 사장님, 조금있다가 약주나 한잔 하시자 하신다. 그저 감사한 거지, 내가 술을 어떻게 마다하겠는가.

가만 앉았는데, 다 피워진 불에 아드님이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 넣는다. 따닥따닥 타는 소리를 내며 불길이 오르고, 옆방 젊은 친구들도 다 소집명령을 내리시더니 안에서 커다란 짐빔술병을 들고 오신다. 한 1리터 이상 되지 싶은데, 젊은 친구들이 내온 새우깡과 오징어, 우리가 내온 육포와 귤로 술상이 봐졌다. 야, 이거 민박집에서 술까지 얻어 먹어도 죄 안받나 몰라.. 이런 내용이 인터넷에 있었으면 미리 알고 안주나 가지고 올껄.. 그냥 좋다고들만 했으니 알수가 있나.. 아니, 술을 우리만 주셨나?.. 세상은 산사 앞자락 답게 깊이 짙은 어둠에 잠겨있고, 모닥불 옆 탁자에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을 못 찍었는데, 젊은 친구들이 가져온 카메라로 기념사진도 찍고, 술이 끝나니 좀 작은 양주병에 또 그 술을 내오신다. 이름하여, '정든주'. 집은 정든민박집, 강아지는 '정든이', 술은 '정든주'다. 무슨 약재로 담그셨는지 술이 달다. 손님들에게 일일이 술을 내시려니 깊은 맛을 내지는 못하는 술이나마, 사람사이 처음엔 소주처럼 쓰고, 써도 마시면서 그렇게 정이 들어가며 깊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마당의 호랑가시나무도 보고, 아드님의 설명에 따라 별자리도 찾아가며, 아이들도 금새 친해져 별자리에 얽힌 그리스-로마신화를 읊어 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어르신의 표현이시다)은 태안반도에서 왔다고 했다. 남녀가 두쌍인데, 그중 둘이 자매간이라니 가족단위로 여행을 온 것이다. 그중 어린 팀이 전에 정든민박을 다녀가고 소개를 해서 이번에 같이 왔다고 했다. 이십대 초반들인데 밝고 착하다. 나중에 술이 한병 더 나오고 그 마저 동이나 젊은 친구들이 가져온 맥주를 마셨다. 야, 나는 무진장 민망했다. 입만 가지고 와서 술은 제일 많이 마셨나 보다. 어른의 성의라 술을 파시라 할 수도 없고, 빈 독처럼 술만 꿀떡꿀떡 부어댔다. 밤이 그렇게 깊어가며, 하나씩 둘씩 방으로 돌아가고, 젊은 친구들 중 연장자인 '철'이와 통성명을 하고, 나이 순번도 따졌다. 생전 본 적이 없던 그와 내가 한 밤에 의기가 뭉쳐 술동무가 되었으니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정들게 만들어 놓는 어른의 솜씨는 가히 경지셨다. 일흔이 되신 어른께서 스물된 친구들과 흉허물없이 말씀을 나누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모닥불 가에서 어른은 조으시고, 어른을 방에 모시고, 철이와 나만 남아 몇잔을 더 비우다가 들어 왔다. 그러고보니 아내는 아까부터 독수공방을 한 셈이었으나, 그 분위기와 자리를 대단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넉넉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덕이었는지, 그로부터 한 두어시간을 아내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조용히 나와 돌 울타리를 돌며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별이 깨끗한 밤 하늘에 별보다 가까이 사람의 마을에 내려와 달린 감들이 인상적이었다. 묵은 조선간장처럼 까만 밤 하늘에 붉은 감들이 별처럼 떴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무진장 친해졌다. (방음시설이 좋은가 옆방소리가 전혀 안들리던데, 혹시 우리가 소근소근하는 것을 옆방에서 숨죽이고 들었던 건 아닌지 몰라.. 들었어도 관계없는 얘기만 했구마는..) 그러다 그러다 언제인지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4. 곰소, 퍽 쓸슬한 소금밭
5. 학생해양수련원지나 왼쪽 길에 조그만 조선소
6. 격포항 쌍등대
7. 어라? 변산해수욕장
8. 바다의 무덤 새만금 방조제
9. 변산온천산장 반지락죽 한그릇
10. 해창 갯가에서의 굴맛
11. 고인돌, 아니 낑낑 돌





박흥열
짬 나는 대로 더 써 올릴겁니다. 너무 긴가 - -? 10.23. 05:47 -  

글을 아주 맛깔스럽게 잘쓰셨네요~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신걸요. 5~11번도 궁금해집니다. 여행 인상깊게 잘 다녀오신것 같아 다행입니다. 결혼전에 약속하신것처럼 가족들과 여행 틈틈이 다니면서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드시기 바랍니다. 후기 감사하다는 말은 2편 올라오면 그때 하겠습니다. ^^; 10.24. 05:31 -  
박흥열
감사합니다. 바뻐서 후기 마무리 짓기가 하세월일줄 알았는데, 이런 칭찬을 받고서야 서둘러 마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10.26. 11:58 -  
박흥열
저는 술에 취해 너무 조용하고 평안히 잤는데, 아내가 그러더군요. 방음은 정말 안됐다고.. ^^; 그래도 잠은 편히 잤다는게 공통의 의견입니다. 10.27. 09:26 -  
임기식
글을 읽다보니 가보지도 안은곳에 12.17. 1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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