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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 용 / 보 / 기
글작성자
 박흥열 2003-10-26 14:21:34 | 조회 : 2356
제      목  변산반도를 가다(2)
기간 : 2003.10.18..13:30 ~ 2003.10.19..22:00 (1박 2일)
숙박 : 정든민박
식당 : 모항포장마찻집(상호를?), 군산식당, 변산온천산장
이동 : 자가용
이동로 : 모항-정든민박-곰소염전-이름모르는 조선소-격포항-변산해수욕장-새만금방조제-해창갯가-지석묘

1. 선운사, 아니 변산
2. 모항에서 지는 해
3. 정든민박 정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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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곰소, 퍽 쓸슬한 소금밭

달게 잤다. 어른께선 벌써 일어나 일을 하고 계셨다. 우리도 일정이 바빠 씻고 짐을 쌌다. 세면장, 화장실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낯설고 물설은 민박에서 이건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다. 여행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할 만한 사항이기도 하다. 짐을 실으러 가다가 '정든이'를 처음 봤다. 아주 예쁜 강아지가 있네-라고만 하고 떠나왔는데, 돌아와 인터넷을 보니 그게 '정든이'였던 걸! 이제 갑니다 인사를 드리니 방명록을 바삐 찾으신다. 아드님께서 가져온 방명록에 미천한 이름석자를 적어 드리고나니 또 붙잡으신다. 감가지나 하나 따가지고 가라시며, 아드님을 시켜 대장대로 감가지를 따주라 하셨다. 아이고, 감이 이뻐도 탐만 내던 차였는데, 아뭇소리 없이 감사하다 서있었다. 감 세알 달린 감가지 하나를 이별의 정표로 받아들고 '철이네 일어나거든 먼저갔다 전해 주세요, 반가웠다고요'하면서 '정든'민박을 떠났다. 하룻밤새 정이 담뿍했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고,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아침을 곰소가서 먹기로 했었으나, 어제 젓갈구매를 포기하고 일정이 수정된 바 있어서 바로 격포항 군산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우리나라에 몇 안남았다는 염전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그냥 가기는 아까웠다. 잠깐만 들러서 염전만 보고가자. 차를 돌려 곰소로 갔다. 어제 오는 길에는 곰소에 젓갈집 두개 있는 거 보고 내소사길로 빠졌는데, 거기가 그 곰소가 아닐성 싶었다. 바다도 없고, 염전도 없었질 않는가? 사진에서의 곰소는 가을 저녁의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며 망망대전(~田)으로 펼쳐진 광활함 이었구마는.. 방향은 잡았는데, 갈래길이 나왔다. 일단, 내소사에서 곰소가는 길이니 우회전! 근데, 간혹 시골길은 서울길 만큼이나 나그네의 기대를 저버리는 수가 있다. 이쪽인줄 알고 가다보면 길이 빙돌아 반대로 가는 수가 왕왕 있는 것이다. 마침 버스정류장에 할머니 한 분이 조그려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계신다.

"아주머니(할머니라고 하면 기분 덜 좋쟎여요), 일루가면 곰소 맞나요?"
길을 여쭸을 뿐인데 대뜸 일어나셔서 '나랑 같이 가면 된다'고 하신다. 자리가 비좁은디.. 불편하셔도 타고 가시겠다는 데, 동방예의국에서 어찌 노인네한테 길만 묻고 제 갈길 가는 "솨가지"를 부릴 것인가. 뒷좌석에 애들 안전발판을 깔아논 상태라 발을 조그리고 가야 하는데, 젊은 이가 차마 그럴수야 있겠나싶어, 아내를 뒤에 태우고 할머니를 앞에 앉으시라 했다. 그리하여, 아무튼 태워드리고, 이르시는 대로 갔다. 한번 쯤 갈래길이 나왔던가.. 여쭐 것 없이 이정표가 훌륭하다. 버스 터미널에서 '나 여그 내려주라' 하시고,  조 옆에 골목으로 돌아가면 염전이라 일러주신다. 캄사합니다.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왼쪽으로 염전같은게 보인다. 근데, 얼루 들어가야 사진에서 봤던 그 장소가 나올꺼나.. 아무 골목으로나 그럴 듯한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길은 막히고, 좌우로 왠 개집이 줄줄한데, 근수깨나 나가게 생긴 개들이 낯선 방문자를 보고는 짖지도 않고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다. 아니, 이런 황당함이라니.. 마침 그 앞에 계시던 아주머니께 길을 물었더니, 도로 나가서 왼짝으로 꺽어가지고 가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고 일러주신다. 또, 감사합니다.

다시 돌려, 큰길을 잡았더니, 좌우로 젓갈집이 좌악하다. 아까 골목길을 알려주신 할머니는 아마 오래전 당신께서 드나들던 길을 일러주신모양이다. 뭐, 간판이며, 플랭카드가 대도시 시장 저리가라다. 마치 계획된 신도시처럼 정비깨끗하고, 간판 색상이 곱다. 얼마 안가 간판들은 끝나가는데,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더 가나 마나 그러는 차에 오른편에 큰 식당과 함꼐 왼편으로 염전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여그구마는.. 염전 앞 대형식당에서 커다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고 앞에 못미쳐서 염전 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차를 돌려 들어가는데, 아내가 샐쭉해 있다. 아까 할머니를 태울때, 묻지도 않고 뒤로 가라고 짐짝 취급했다는 것이다. 첨보는 사람은 편한 앞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로 가라 하고..라는게 요지다. 야, 그럼 어떻게 할머니를 조그리고 가시라 하냐, 그랬더니 아무 말이 없다. 간만에 놀러와서 배려를 받고 싶은데, 의논도 없이 그래버리니 할머니를 태운일이 아니라 그 독자적인 태도 자체가 섭섭했던거다. 그나마 상대가 할머니인 상황이라서 이해하고 참지, 젊은 분 같았으면 그 섭섭하기가 토라지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미안해, 미안해 했더니 곧 풀렸다.

(일행이 있는 여행은 배려를 중시해야 한다. 누가 하나 독자적인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르라 하면 나머지 누군가는 반드시 기분 잡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난 젓갈정식 먹고 싶은데, 산채비빔밥으로 통일하자는 식이다. 사실 여행가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각자 올라오고 싶지 않다면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염전에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침 8시반이나, 9시나 된 시각이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닌데 마치 죽은 도시의 그림자처럼 염전은 고요했다. 소금창고는 곰팡이가 슬어 영화에나 나올 법하고, 꼭꼭 닫혀 있었다. 염전에 물이 많이 차있는 편이어서 소금 결정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수로로 보이는 길에도 낮은 지붕을 씌워놨던 것과, 염전 바닥이 전부 타일이 깔려 있던 것들이 인상적이었다고나 할까.. 딸아이에게 '이 타일의 물이 마르면 소금이 되는 거야, 여기 이 뒤집어진 외발수레로 소금을 퍼서 저 창고로 나르는 거야'했더니 그런건 삼척동자도 알겠다는 표정이다. 창고 앞에 새 발모양의 목로가 나있다. 소금수레가 다니는 길이다. 오기전에 어디선가 찢어 읽은 바로는, 이 곰소 염전은 뭐라는 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바인데, 얼마전에 염전의 반인가 얼마를 떼어 다른 것으로 용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제 이나마 타산이 맞지 않아 슬금슬금 다 없어질 것을 생각하면 밀려나는 산업의 쓸슬함과 무거운 고독을 짐작할 만한 풍경을, 곰소 염전은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본 영화 '엄마없는 하늘아래'에서 꼬마 주인공이 소금물을 퍼 올리는 물레방아를 밟아 돌리던 화면이 생각났다. 상이용사가 된 안성기가 넓은 소금밭을 걸어 오던 장면이나, 동생들을 먹여 살린다고 염전에 나가 일하던 그 꼬마 주인공을 보며 엄청 감동했던 기억이 소롯하다. 소금창고는 특이하게도 사다리꼴 벽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상식으로 알고 있는 직사각형의 벽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올 수록 벽 넓이가 넓어지는데, 네면이 다 그랬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벽의 아랫단은 고무판 같은 것으로 둘러 놓았다. 소금의 증발이나 새내림을 막느라 그런듯도 한데, 그 아랫단고무치마(?)를 가진 창고도 있고, 안가진 창고도 있다. 벽은 널판지를 가로로 차곡차곡 이어 붙여 올렸는데, 오랜 장마에 습기낀 낡은 집 어느 구석처럼 검은 곰팡이가 잔뜩 붙어 있었다. 사람은 없지, 곰팡이 가득한 낡은 소금 창고와 챙겨 놓은게 아니고 뒤집어져 버려진 듯한 각도로 누웠는 외발 수레며 그런 저런 효과 때문에 우리는 영화 세트장에 와 있는것 같았다.

소금창고 뒷쪽의 길은 뻘로된 바닥임을 증명하듯 붉은 벽돌을 부숴 깔아 놓았다. 어느 쓸만한 건물하나가 무슨 사정인가로 부숴지게 되자, 주워다 깨서 깔았으리란 짐작을 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이제 물레방아를 발로 밟아 돌리는 고된 노동의 풍경대신에 양수기가 콸콸 품어 올리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을 따름이다. 길건너 큰 식당에선 귀담아 들리지 않는 유행가를 우렁우렁 틀어대고 있었다. 세상이 시끄러워도 소금은 궈진다는 듯이, 쓸슬한 염전의 풍경에 전혀 아랑곳 없이 길 하나 건너 큰 식당의 음악은 명랑했다. 저 염전의 쓸슬함이 이 식당의 매출을 신장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을지라도, 유명하다는 염전을 봤응께 음식은 즐거운 맴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처럼, 세상의 길을 이웃하여 가더라도 같이 또 따로 놀고 있었다.

상이 비좁다는 군산식당에서 아침을 먹어야 했으므로, 그곳이 여기서 얼마나 먼지 잘 알지 못했으므로 부지런히 곰소를 떠났다. 곰소에는 젓갈파는 집이 정말 많았고, 젓갈집에 관한한 서울 어느 시장에 부족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애초 젓갈차림밥을 한번 먹고, 젓갈도 돈 되는 대로 조금씩만 사가지고 가자는 출발시의 초심을 버리기로 한건, 이 곰소가 원래 젓갈로 유명한 고장이 아니었는데 최근에 유명해져 버렸다는 점, 김장철이면 서울서 사람을 빠스로 바리바리 싣고 와 풀어 놓고 젓갈을 사가기 땜시로, 이 고장 선어물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외지의 어물도 많이 데려다가 젓갈을 담그기도 한다는 점,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떤 모종의 상업적 아우라가 작용하는 쓸슬함을 가진 동네라는 점 때문이었다.

예전에 그렇게 컸다는 항구도시 곰소의 명성을 밀려오는 뻘때문에 조금씩 격포항에 빼앗기고 이제는 위도를 가는 배도 격포항에서 뜨고 지게 되면서, 곰소는 그 잊혀짐이 못내 아팠을 것이다. 풍요롭던 칠산 앞바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다가, 어느 소금창고처럼 쓸슬해져 버린 곰소가 비록 상업적 아우라일지라도, 젓갈로써 다시 태어난 다는 건, 곰소로서도, 곰소 사람들에게도 분명 기뻐해야할 일이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우라가 전통적인 손맛을 담아내거나, 그 지방만의 딱 그 맛, 그 방법을 창출해 내지 못하고 상업적 매매에만 밀려 대량으로 간다면, 곰소는 설령 더 커진다 하더라도 오래가는 맛으로 기억되지는 못할것이다.

내가 정든민박이나 김상훈님의 홈페이지(http://byunsan.new21.org)에서 많이 배운점은 그런 점들이었다. 바가지 안씌우고, 맛스럽게 기억되는 변산이어야 오래오래 기억되고 다시 가고 싶어지는 고장이 될 거라는 것! 청정 칠산앞바다의 선어물이 곰소의 가정마다 내려오는 오랜 젓갈만드는 법에 충실하게 만들어지고, 서울 입맛을 따라가기 위해 미원을 넣거나 물을 타지 않고 쓰다 맵다 해도 곰소의 그 맛을 지켜나갈 때, 곰소는 전국의 어딜 가더라도 곰소의 맛이 그리운 사람들이 다시 찾는 관광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 누구보다도 동네 사람들이 먼저, 전국 어디가나 동일한 맛의 젓갈로서 곰소젓갈을 품평한다면 특히 곰소젓갈이라 이를 이유가 되겠는가?

모항의 포장마차 아주머니도 정든민박의 아저씨도 곰소젓갈 유명하다고, 당신들께서도 간혹 사다먹기도 한다고, 좀 사가지고 가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어디가도 같은 맛이라는 그 한마디의 꼬릿말이 내게 안겨준 건, 대량으로 쏟아지는 서울사람들이 버려놓은 또 한곳의 관광지가 아니겠는가 하는 씁쓸함이었다. 지금은 전국어느 관광지를 가도 사찰 앞에서 관광지에서 파는 기념품이 전부 똑같다. 맨 그 등긁개고 맨 그 나물이고 맨 그 풍선이다. 수건에 한줄 씌인 어디관광기념이란 글자만 빼면, 도무지 어딜다녀왔는지 알수 없어는 기념품이 관광지의 열악한 상업적 능력이고, 그 관광지를 그렇게 만든건 서울사람들의 자본력에 관광지가 입맛을 맞추려고 쫒아간 것에 다름아니다. 이 등긁개는 전국에 딱 한곳, 그곳을 다녀와야만 구할 수 있는 제품이고, 이 맛은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맛일때 오래가는 그 감동이 생길것이다.

아뭏든 복잡한 사설을 넘어서 젓갈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리의 젓갈집이 풍성해서 열발접고 감사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일정은 짧고 더 오랜 쇠고집으로 유명한 집들을 줄줄이 찾아야 했으므로 나는 쉽게 곰소를 떠났다. 나는 곰소 젓갈 얘기를 허정균님의 홈페이지(http://user.chollian.net/~huhja/index.html)에서 인상깊게 봤는데, 거기서 소개한 '부부식품'은 알고보니 곰소에 있지 않고 격포에서 변산해수욕장가는 길중에 있었다. 그런 연유로 젓갈은 부부식품에 가서 사기로 하고, 곰소를 떠났는데, 엉뚱하게도 못내 아쉬웠던 젓갈에 대한 마음때문에, 정작 젓갈은 올라오던 어느 휴게소에서 강경젓갈을 사고 말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지금 그 여행의 마무리로 강경산 작은 젓갈 두통이 손에 남았다. 그 젓갈맛을 보면서 나는 다시 곰소를 떠올린다. 와우, 그래도 거기서 젓갈밥을 한번 먹을껄 그랬나? 먹어보도 않고 가는 귀로만 곰소를 보고 지나친건 아니었던가? 아내와 그런 얘기를 해 봤다. 그래도 한번 먹어볼걸 그랬어..그러면서.. 아내도 우리 귀가 너무 얇았던 것 같다고 하지만, 이미 떠난 배였다. 이제는 다음에 가면 곰소젓갈을 꼭 한번 먹어보고 리얼한 감상평을 남기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에구, 또 자동으로 침이 고인다. 아까운 젓갈이 이제 반도 안남았는데..


5. 학생해양수련원지나 왼쪽 길에 조그만 조선소

다시 모항가는 길이다. 해가 언덕을 넘어 올라 진한 아침 햇살을 뿌린다. 이제 익숙해져버린 모항가는 길을 뒤로 접고 가다보니 왼쪽으로 학생해양수련원이 나온다. 야, 조런데서 수련하면 좋겠다 싶다. 밝은 바다를 다시 보고 싶어서 수련원 지나 왼쪽으로 보이는 바닷가로 길을 꺾었다. 땅에 올라앉은 배와 가설건물 사이로 조그만 바다가 보이는 길을 자분자분 가니, 빈 동네인 듯한 길에  오빠와 동생인듯한 꼬마 둘이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다.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바다 쫌만 보고 가자고 했다.

왼쪽으로 땅에 올라앉은 배는 아직 건조중인 모양이다. 배 뒷쪽으로 건조된 배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 놓여 있었다. 이 몇미터만 나가면 너는 비로소 당당한 배가 될 수 있겠구나. 그런데, 웬일인지 배를 배답게 마무리짓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 빈 배는 비로소 배가 되는 날을 혼자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은 무슨 창고 같은 건물이고, 모래를 밟고 내려서니 자그만 백사장에 여기저기 그물이 널려 있다. 구멍난 곳을 기워서 펼쳐놓은 것이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인듯 싶다. 백사장 오른쪽으로 한대의 트럭이 와 서고, 사람들이 내렸다. 오늘 그쪽에 있는 고깃배를 타거나, 그 배와 관련된 일을 할 인부들인가 보다. 잔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 앞에 나무들이 박혀있는 걸 봐선 양식장이다. 인적드문 조선소 앞 백사장을 파도가 얼마나 핥고 다녔는지, 조개조각들이 하얗게 표백되어 둥글둥글하게 갈려있다. 맨발의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만한 물건이 전혀 없는 온통 둥글고 부드럽고 작고 예쁜 해변이었다. 조선소에는 사람이 없고, 오른편 배와 창고건물 같은 곳에만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거기서 잠시, 우리는 평화로왔다. 여섯살된, 그래서 인제 제 이름 석자밖에 쓸줄 모르는 아들은 이런 해변을 처음 본 것이다. 엊저녁 모항의 콘크리트 선착장에 비할 바 없이 깨끗한 자연의 해변이다. 모래밭에 제 이름을 썼더니 파도가 와서 지워버렸다고 와서 이른다. 아홉살된 딸아이는 모래밭에서 연신 이쁜 조개껍질을 줍느라 바쁘다. 제대로 된 조개 껍질이 하나 없으되, 깨어져 갈리고 하얗게 표백된 파편들은 그 작은 손으로 주워 보기엔 그야말로 보석에 다름없는 모양이다. 조약돌도 예쁘고, 모래도 그리 고울수가 없다. 하다못해 깨진 녹색 소주병 파편도 한두개 나왔는데, 그야말로 갈리고 갈려서 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뭔 종류의 보석이 아니냐고 가져온 소줏병 파편은, 이태껏 내가 본 소줏병 파편중에서 제일 이뻣다.

오래전에 누군가 이 바닷가에서 슬프고 서러운 일이 있어 뒤치락거리는 밤바다를 보며 소주를 한잔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을 준 사람에게는 못하고, 힘없고 어린 가정에서도 못하고, 혼자 바닷가에서 소주병을 깨 부시는 걸로 그 깊은 슬픔을 달랬던 것이다. 그 이는 떠나고 소식이 없지만, 그 파편이 멀리가지는 못하고, 오래오래 이 바닷가에 남아 저 혼자 슬픔을 갈고 삭혔던 것이다. 파도가 달래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갈과 조개껍데기와 어깨동무하고 쓸려 나갔다 다시 돌아오기를 얼마인지 모르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딸아이 손에 발견된 것이다. 우리 딸아이가 보기에 보석이 아니냐고 생각할 만큼 보드랍고 둥글게 갈린 파편은 이제 모든 아픔을 다 잊은 듯, 예쁜 초록색 유릿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햇살은 아름다왔다. 갈매기도 몇마리 있어 주었다. 아내는 배가 바다로 나가는 레일에 붙은 따개비를 보며 묵은 세월을 더듬고 있었다. 돈 내고 들어가야 하는 어느 좋다는 관광지도 여기만큼 하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이런 것이다. 자잘한 때를 씻어버리고 자연의 마음을 들여다 보며 평화를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도 돌아가 저 파편처럼 살아야지. 베일수 있는 마음의 모서리를 갈고 쓰다듬으며 살아야지. 얼마나 인적이 드물고 예의 그 '서울 사람들'이 밟고 가지 않은 흔적이 역력한지, 아무리 찾으려도 철사조가리 하나, 캔깡통 부시러기 하나가 없는 그야말로 청정 자연의 그 모습 그대로 였다. 갑자기 자연이 너무 고마워 지고, 변산반도가 지극히 아름다워 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자고 해도 싫단다. 조금만 더 놀다가자고 조른다. 배 안고파? 응!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듯한 눈망울로 더 놀겠단다. 아이들에게 평화를 주는 놀이터가 이 지상에 그리 흔치 않음을 아는 나로서는, 그리고 어떤 전쟁터에서도 아이들은 평화롭게 참고 놀 줄 앎을 아는 나로서는 그 눈망울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만 더 있다가 그 평화를 떠났다. 여기서 반나절을 다 보내고 가도 좋을 것인데.. 그러면서..


6. 격포항 쌍등대
7. 어라? 변산해수욕장
8. 바다의 무덤 새만금 방조제
9. 변산온천산장 반지락죽 한그릇
10. 해창 갯가에서의 굴맛
11. 고인돌, 아니 낑낑 돌
* 김상훈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04-12 14:34)

이야~ 보면서 감탄 연발합니다. 부안 지역 신문에 소개 안되낭 ^^; "여행은 이런 것이다. 자잘한 때를 씻어버리고 자연의 마음을 들여다 보며 평화를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멋지군요. 2편도 아주 잘 봤습니다. 6~11번이 있는걸 보니 3편도 있을것 같군요. 기다리겠습니다~ ^^ 10.28. 0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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